[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1화 숙종
조선 후기는 흔히 생각하듯 임진왜란 이후가 아니라 숙종 때부터입니다. 유교 특히 성리학이 조선의 이념으로 중심 잡혔고 화폐가 유통되어 상업에 눈 뜨는 시기였고 홍수, 가뭄, 기근이 심했기도 했고 이웃한 청국과 일본도 변화가 심했던 격동기 시절이지요.
숙종(肅宗)의 숙(肅)은 엄숙하다는 뜻입니다. 사후에 붙인 이름 그대로 임금 앞에서 입 다물라 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실제로 조선 임금 중에서 제일 무서웠던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하들은 임금을 공경하면서도 공포와 경계했습니다. 이때 신하들이 제일 많이 죽었으니까요. 별명을 붙이자면 조폭왕 같은 분입니다. 거스르는 신하뿐 아니라 자기 아들을 낳아준 후궁 장희빈까지 죽였습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임금이 될 운명이었다.”
하며 14살 어린 나이에 임금 자리에 앉지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할아버지 효종이나 아버지 현종이 사가에 살다가 임금이 되었지만 자기는 궁궐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지요. 병약한 몸이었으나 환갑나이까지 살았으니 오랫동안 임금 노릇 했지요. 임금이 되었을 때 청국에서는 오삼계의 난이 일어나 바다에서는 정성공이 반청복명을 외치고 국내에서는 윤휴가 북벌을 주장해서 나라가 위태로웠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소빙하기 시대를 맞아 내리 흉년이 든데다 천연두가 창궐해 200만 명이 죽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다른 임금이었으면 벌써 쿠데타가 일어나 쫓겨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효종과 아버지 현종을 개똥처럼 여기며 좌지우지하던 재야(在野)의 실세 우암 송시열을 즉위 초에 귀양 보내고 나중에는 장희빈에게서 낳은 아들을 원자로 삼는 것을 반대하자 사약까지 내린 무서운 임금이었습니다.
“상중에 낳은 아들이라 못마땅했다.”
자신을 아버지 현종이 상중에 왕후와 관계해서 얻은 아들이라고 송시열이 험구한 것을 알고 줄곧 벼르고 있다가 임금이 되자 핑계를 대고 귀양을 보내고 끝내는 죽여 버린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었지만, 숙종의 어머니 말대로 변덕이 죽 끓듯 하고 대담한 성격에 타고난 권모술수로 신하들은 다스리자 모두 무서워 벌벌 떨어야 했습니다.
“괘씸한 서인들을 몰아내고 남인으로 바꿔라.”
“무능한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을 다시 불러라.”
서인에서 남인으로 또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을 바꾸며 신하의 권력이 세지는 것을 경계하고 왕권(王權)을 강화했습니다. 이런 과단성을 해서 신하들이 불만을 품고 쿠데타 할 여지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밖으로는 외침의 위협과 안으로는 기근에 시달렸지만, 신권(臣權)은 아주 약화 되었습니다. 다른 당파끼리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고자질하게 해 백성이 수탈당하는 것도 막았습니다. 이런 통치술 와중에 인현왕후, 장희빈이 희생되었습니다. 서인 양반을 대표하는 인현왕후와 부유한 역관 중인 계급을 대표하는 장희빈은 서로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다가 한 명은 쫓겨나고 한 명은 사약을 받았던 것입니다.
숙종은 폭군이었을까요? 백성이 기근으로 죽어나가는데도 본인은 호사스런 미식취미를 계속했으니 인자한 임금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냥을 한 번도 하지 않고 백성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민정시찰을 자주 하며 곳곳에 산성을 쌓는 등 국방에 신경을 많이 쓴 의식 있는 임금이기도 했습니다. 동북아의 격동 치는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청(淸)에 대해 북벌을 주장하는 윤휴를 죽이고 신하로서 임금을 업신여겼던 재야의 최고 실세 송시열을 죽이는 등 과감한 정치행태를 보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었지만, 줏대가 있고 경륜이 뛰어난 숙종이 있었기에 그 아들 영조에 의해 국가의 기틀이 잡혔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