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3화 인현왕후

[최영찬의 두루두루 조선 후기사]

 

제3화 인현왕후

 

인현왕후의 본가는 지금의 종로구 안국동에 있었는데‘감고당’이라고 불렀습니다. 명문가인 여흥 민씨 민유중의 딸로 예의범절이 뛰어난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 행장에 나타나 있는데 죽은 사람에게 나쁘게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역관의 딸로 자유분방 했던 장희빈과는 분명히 달랐을 것입니다.

예전에 왕비는 한 인간이나 여자이기 전에 당파와 문중을 대표해서 임금이 될 세자와 혼인해서 왕자를 생산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었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잡고 있던 당시 서인(西人)들은 왕비는 무조건 서인 집안이어야 한다고 밀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왕실에서도 이런 격을 맞추었고 얼굴이 예쁜 것보다 후덕한 것을 먼저 쳤지요. 왕실의 웃어른들에게 고분고분하면서도 엉덩짝이 튼실한 것이 자식 잘 낳게 생겨야 세자빈으로 뽑힙니다. 세자가 어떻게 생각하든 자기들 입맛에 맞는 여자를 세자빈으로 뽑았으니 마음에 들겠어요? 순전히 아들 잘 낳고 장차 왕비가 되어 내명부 관리 잘하는 수준이면 되지요. 그래서인지 역대 임금이 정실이 낳은 사람이 왕이 되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택일해서 의무방어전만 치르는 임금이니 무슨 애정의 결실이 맺어지겠습니까. 숙종은 병사한 첫 번째 왕비도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에게도 아이가 없었습니다. 양반이 결혼은 같은 격의 양반집 규수로 하고 사랑은 첩에게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결국, 아들을 낳은 장희빈에게 왕비 자리를 내주고 본가로 쫒겨갑니다.

“에이, 나쁜 놈. 본처 쫓아내고 잘 사는 놈 없다더라.”

사랑도 제대로 안 주고 본처를 쫓아낸 임금에 대해 이렇게 욕을 함직도 한데 인현왕후는 일체 외출도 안 하고 죽은 듯이 지냈다고 합니다. 양반집 규수로 태어나서 궁으로 들어간 것부터 인내의 연속이었으니 임금에게 소박맞은 불행을 숙명으로 알았을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밖에서 아이들이 놀면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장다리는 한 철이요, 미나리는 사 철이다.”

이 말은 권력을 남인에게 빼앗긴 서인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고 퍼뜨린 노래였습니다. 장다리는 장희빈을 말하는 것이고 미나리는 인현왕후를 말하는 것으로 왕후가 쫓겨난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백성에게 알리는 것이었지요. 김만중이 귀양지에서 쓴‘사씨남정기’라는 소설을 숙종이 읽고 나서 마음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즉 사씨는 첩으로 본처를 모함해서 내쫓았다는 내용입니다. 숙종은 버르장머리 없는 장희빈에게 싫증을 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훗날 숙빈이 되는 무수리에게서 인현왕후의 동정을 듣고 내시를 감고당으로 보내 염탐을 시키니 정말 마치 죄인처럼 소복을 입고 검소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음, 역시 여자는 정숙해야 돼. 배운 게 없는 희빈하고 달라.”

쫓아낸 임금을 원망하지 않는 교양 있고 학식 있는 인현왕후와 천방지축 장희빈을 비교하며 변덕스런 왕은 인현왕후를 다시 불러들이기로 합니다. 왕비 자리는 하나이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장희빈은 다시 후궁으로 돌아갑니다. 세자가 인현왕후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며 따르자 생모인 장희빈은 분노해서 세자를 마구 때리기도 했습니다. 인현왕후는 다시 궁으로 들어오나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후에 죽게 됩니다. 그녀가 죽자 일은 엉뚱한 데서 터집니다. 하룻밤 잠자리로 왕자를 낳은 숙빈 최씨가 임금에게 고자질했기 때문입니다.

“희빈 장씨가 왕후마마를 저주하며 매일 초상에 활을 쏘았다고 합니다.”

이 말에 숙종이 직접 장희빈의 처소를 찾아가 저주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이에 격분해서 결국 장희빈을 사약을 먹여 죽입니다. 자기가 잘못 처신한 것은 생각도 못한 모양입니다.

 


이시우 기자
작성 2018.08.14 11:27 수정 2019.12.30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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